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* 2000년대 중반 [[강호순]] 연쇄살인 사건, [[화성 여대생 살인 사건]]이 터졌을 때 경기도 남부에서 주로 젊은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사건과 같은 범인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경찰이나[[https://youtu.be/fnTBFIVgyZE|#]] 전문가들의 추측도 많았고 당시 뉴스 기사도 연관성을 많이 언급하였다. 그러나 2009년에 강호순이 잡혔고 1969년생인 강호순은 이 사건 당시 충남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훗날 이춘재가 진범임이 드러나면서 강호순과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다. 화성 여대생 살인 사건 역시 장소나 수법은 비슷하지만 이춘재가 교도소에 들어간 뒤에 일어난 사건이라 관련이 없음이 드러났다. * 범인이 잡히자 화성 시의회에서는 본 사건을 [[http://naver.me/xhOuJXZN|이춘재 살인사건]]으로 명칭 변경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. 오랫동안 "화성 연쇄살인 사건"으로 불려 왔고 영화 [[살인의 추억]]이 히트치면서 지역 이미지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좀 회복되나 싶더니 진범 검거로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다시 [[범죄도시]] 이미지가 생겨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다. 이에 시의회의 명칭 변경 의견을 경찰에서 수용해 공식적으로 사건의 이름을 '''이춘재 연쇄살인 사건'''으로 수정했다. * 당시 현장 책임자 하승균은 범죄 행각에 어찌나 분노했는지 그때 범인 잡으면 재판까지 안 데리고 가려고 했다고 [[http://m.monthly.chosun.com/client/mdaily/daily_view.asp?idx=7941&Newsnumb=2019097941|고백]]한 바 있다. '잡힐 때 반항할 테니까 그럼 내가 그 자리에서[[사살|…]]' 이런 생각이었다고. 하지만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해 자신은 실패한 형사, 죄인, 패배자라며 자책감을 안고 살았다. 정년이 되기 전에 사표를 낸 것도, 마지막 10차 사건 공소시효를 몇 달 앞두었기 때문.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마다 언론에서 찾아와 대서특필되곤 했는데 '범인도 못 잡은 놈이 자꾸 신문에 나는 것도 망신스럽고, 그때까지 월급받고 있기도 민망해서'였다고 스스로 밝혔다. 조선일보 2005년 10월31일자에 그의 인터뷰 내용을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해 실은 기사가 나온 바 있는데 그의 심정을 담은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다. ||『악마』 난 자넬 이렇게 부르네. 맘에 들지 모르지만 자네의 존재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10여 년 전에 내가 붙인 이름이지. 한 명인지 두 명인지,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자네, 혹은 자네들을 만나려고 난 그간 무던히도 애를 써 왔네. 자네 쪽에서는 그 반대였겠지만 말야. 난 요즘 또다시 화성에서 일하네. 자네도 알는지 모르겠지만 작년 말 화성에서 귀가하던 여대생이 실종, 살해된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어. 그 사건이 여태 해결되지 않아 거기서 수사지도를 하고 있네. 근데 말야. 참 질긴 악연이지. 여대생이 실종, 살해된 곳이 바로 그 동네야. 자네 혹은 자네들이 귀한 생명들을 무참히 짓밟고 다니던 그 동네. 수사본부도 그때 그 파출소 자리에 있다네. 기분이 어떤가? 이제 자네를 잡아도 7차 사건까지는 「죄」를 물을 수 없네. 8차 사건 범인은 잡혔지만, 9차 사건의 공소시효도 다음달로 다가왔고 마지막 10차 사건은 내년 4월에 만료된다고 하네. 나도 내년(2006년) 6월이 정년이야. 지난(11월) 21일이 현직에서 맞은 마지막 경찰의 날이었던 셈이지. 시효만료에 담당형사는 정년이라. 자네는 꼭 내 손으로 수갑을 채우려고 했는데 이제 그 수갑도 반납해야 해. 1·2차 사건이 발생한 뒤 그러니까 1986년 12월 당시 수원경찰서 형사계장으로 있을 때 화성사건 수사본부로 차출돼 갔으니 내년이면 정말 꼭 20년이구먼. 몇 달씩 집에도 안 들어가고 자네를 잡으려고 미친 놈처럼 다녔어. 마누라와 애들 생일은 몰라도 자네가 저지른 범행날짜와 시간, 형태는 아직도 줄줄 외우고 있네. 내 부하는 과로로 쓰러져 지금까지 반신불수로 있고, 또 다른 부하들은 용의자를 무리하게 조사하다가 숨지게 하는 과오도 저질렀지. 나 역시 직위해제가 됐었고 말이야. 그런 중에도 자네는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추가 범행들을 저질러 갔어. 왜 그랬나. 자네도 아마 이제 중년이 됐겠지. 자넨 성격이 무척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없는 사람인데, 결혼은 했나? 아이들은 있어? 자네가 죽인 사람 가운데는 70세가 넘은 노파도 있었어. 어머니 생각은 안 나던가. 갓 결혼한 새댁도 있었고, 꽃다운 스무 살 처녀와 앳된 여고생·여중생도 있었어.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던가. 난 자네가 다녀간 곳에 나가 사체를 수습하며 분을 참을 수 없었어. 그러곤 자네를 잡으면 결코 법정에 세우지 않고 내 손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다짐을 했지. 하지만 그러면 뭘 해. 난 결국 자넬 잡지 못했고 나를 바라보는 후배들이나 피해자 가족들에겐 평생 죄인으로 남게 됐네. 난 요즘도 꿈을 꾸네. 자네가 저지른 악마와 같은 범죄. 알몸으로 묶인 채 난행을 당한 우리 누이, 동생, 딸들. 그리곤 또 꿈을 꾸지. 내일 당장이라도 자네 같은 악마에게는 공소시효라는 것이 없어져 내가 나간 뒤라도 우리 후배들이 자네를 잡아들이는 꿈을. 그래 난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. 그렇지만 난 아직 화성에 있고 그만두는 날까진 자넬 찾아다닐 것이네. 그리고 그 망할 놈의 공소시효만 없다면 내가 없더라도 우리 후배들이 자넬 반드시 잡을 거야. 지금은 우리도 예전과 달라. 부디 나보다 먼저 죽지 말게. 우리 꼭 만나야지. 안 그런가?|| * 당시 수사 관계자들에게도 이 사건은 잊지 못할 한이었는지 80년대 화성 사건의 담당 형사[* 김복준 前 [[동두천경찰서]] 수사과장이자 현 한국범죄학연구소 연구위원. 각종 프로그램에서 패널 출연 중.]가 페이스북에 DNA가 일치하는 용의자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현장 책임자[* 하승균 전 경기지방경찰청 강력계장]와 통화하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은 불가능하더라도 범인을 잡아 국민 앞에 세우겠다는 약속이 실현되려 하고 있어 감격스럽다는 글을 올렸다. [[https://news.joins.com/article/23580900|#]] 이후 이춘재가 자백하자 표창원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, 당시에 수사에 참여했던 모든 경찰관들이 자괴감을 느꼈었다며 트위터에 수사진에게 감사하는 내용을 올렸다. [[https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2&oid=018&aid=0004481176|#]] * 기사에 따르면, 연쇄살인범인 [[유영철]]은 저 화성 살인범이 사망했거나 [[교도소]]에 수감 중일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연쇄살인범의 경우 살인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. [[http://newsmaker.khan.co.kr/khnm.html?mode=view&artid=12643&code=115|#]]연쇄살인범과 같은 강력범들에게는 의외로 [[교도소]]가 도피처이자 은신처가 될 수 있다. 아무리 흉악한 토막살인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언론이 관심 있게 취재하는 기간은 기껏해야 사건 직후 몇 달 동안이고 경찰의 수사망이 집중되는 기간도 초기 얼마 동안이다.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대중의 관심도 서서히 식게 되고, 경찰의 수사도 새로운 단서가 나오지 않는 한 흐지부지되어 버린다. 그동안에 [[소매치기]]나 [[사기]] 등의 잡범으로 잡혀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면 못해도 몇 년 동안의 공소시효 기간을 흘려보낼 수 있다. 경찰도 대중들도 [[등잔 밑이 어둡다|'''설마 그 흉악무도한 살인범이 벌써 교도소에서 다른 죄로 복역 중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는다는 점'''을 역이용하는 것이다.]] 범죄자 DNA 수집 이후 이런 식으로 고의로 잡범으로 붙잡혀서 도망친 중범죄자들이 잡히는 실적이 꽤 있어서 DNA 수집에 대한 인권침해 논란도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. 실제로 또 다른 장기미제 사건이었던 [[드들강 여고생 살인 사건]]의 범인 김도룡도 범행 후 개를 여러 마리 훔쳐 절도로 수감된 덕에 수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. '''그리고 2019년에 정말로 진범이 이미 다른 살인 사건으로 수감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.''' 같은 (연쇄)살인마인 유영철의 예상이 맞았던 셈이다. 실제로도 연쇄살인범들이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살인을 할 수 없었거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몇 년 정도 살인을 중지하다가 다시 재개하는 경우는 많아도, 아예 완전히 그만두는 사례는 드물다.[* 다만 이런 사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대표적으로 [[중국]]판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불리는 [[바이인 연쇄살인 사건]]의 범인 [[가오청융]]은 마지막 사건 이후 14년 동안 살인을 완전히 그만두었다가 잡혔고 미국의 유명한 연쇄살인범 [[오리지널 나이트 스토커]]의 용의자도 살인을 완전히 중단한 지 32년 후에야 잡혔다.] * [[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|개구리 소년 사건]]도 [[https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POD&mid=sec&oid=001&aid=0011090205&isYeonhapFlash=Y&rc=N|재수사에 들어갔다고 한다.]] 다만 개구리 소년 사건은 이 사건과는 달리 범인을 특정할 만한 직접적인 DNA 같은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은 걸로 알려진 데다 유골 발굴을 엉망으로 해 버려 그나마 남아있는 증거를 경찰 스스로 없애 성과를 거둘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. [[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]] 역시 [[http://www.ichannela.com/news/main/news_detailPage.do?publishId=000000167062|재수사에 들어갔다.]] 참고로 이 사건 역시 목소리만 남아있어서 성과를 거둘 수 있는지 알 수 없다. * 중국판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[[바이인 연쇄살인 사건]]이 있다. 이 사건도 [[2016년]] [[8월 26일]]에 범인이 검거되면서 해결되었다. * 전 경찰대 교수이자 전 [[용인시 정]] 국회의원인 [[표창원]]이 8차 사건 이후인 1990년 7월에 화성경찰서 기동대(시위 진압이 주 임무) 소대장으로 부임하여 본 사건의 현장 지원도 나가던 와중에 9차 사건(1990년 11월)을 목도하게 되었다고. 이를 계기로 자괴감을 느껴 경찰 선진국인 영국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. 다만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 범인이 외지인일 것이라는 잘못된 프로파일링을 한 것은 그의 경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오점이나 당시엔 그 누구도 범인을 특정해낸 사람이 없는 장기 미제사건이었고 유력 용의자가 나오기까지만도 30년이 넘게 걸렸으니 이해를 못할 것도 아니다. * "비 오는 날 밤에 빨간 옷을 입은 여자를 죽인다."는 [[괴담]]이 돌아 빨간 옷의 판매가 급격히 줄어들거나 비 오는 날에 외출이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. 2~4차까지 피해자들이 붉은 옷을 입었고 흐리거나 안개가 낀 날 주로 범행했다. * 영화 [[살인의 추억]]이 이 괴담들을 비중 있게 다루어서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. 영화에는 4차 사건 피해자가 비 오는 날에 외출하려다가 빨간 옷을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는 장면도 있다. * 영화 [[살인의 추억]]에 나왔던 [[점쟁이]]를 찾아간 일은 사실이라고 한다.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[[풍수]]가 좋지 않다고 해서 경찰서 위치를 옮겨 보기도 하는 등 별별 수를 다 써봤다고. ''''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''''라는 말을 써 놓은 [[허수아비]]도 실제로 세워 놨다고 한다. 당시 사진 자료를 보면 관련 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. 저 문구가 워낙 인상 깊어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[[살인의 추억]]의 제목이 될 뻔했다.[* 이 문구를 제목으로 밀었던 사람은 바로 [[박찬욱]](...).] 그런데 형사들이 수사를 하며 미신의 힘을 빌었던 건 대한민국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고 DNA 수사기법이 발달하기전 미국에서도 종종 있었다. 도무지 실마리가 없을 때 심령술사를 찾아가기도 했으며 이걸로 꽤 유명한 스타급 심령술사도 있었다. [[https://www.ranker.com/list/investigations-where-police-used-psychics-for-help/caroline-cooney|#]] * 사건이 진행되던 1986년부터 1991년까지 [[수원시]] 지역 중고등학교들은 여전히 [[야간자율학습]]을 강행했다.[* 물론 화성 사건의 여파가 워낙 커서 수원 지역 교장회의에서 야자 시간을 줄이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이럴 때일수록 '면학 분위기를 해치면 안 된다'면서 거부당했다고 한다. 참고로 수원은 전통적으로 학구열이 높은 지역으로 사건 당시 야자는 웬만해서는 필수였다. 물론 2010년대 들어 [[학생인권조례]]가 통과되면서야간자율학습은 말 그대로 자율이 되었다.] 결국 1989년 7월 3일 수원 오목천동에 거주하던 한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2학년 학생 정모 양이 야자를 마치고 귀가 도중 실종되었고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89071000329214005&editNo=3&printCount=1&publishDate=1989-07-10&officeId=00032&pageNo=14&printNo=13473&publishType=00020|9일에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.]] 지역이 다르고 수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화성 연쇄살인의 동일범으로 취급되지는 않았고 화성 연쇄 살인처럼 범인을 잡지 못해 2004년 7월 3일 공소시효 만료로 결국 미제사건으로 끝났다. 하지만 결국 [[이춘재/연쇄살인 외 사건|이춘재의 자백]]으로 동일범임이 밝혀졌다. 수법이 지극히 잔혹해서[* 수원시 오목천동 농수로에서 1989년 7월 9일 알몸의 시체로 발견됐는데 가슴은 예리한 흉기로 도려내져 있었고 옷이 벗겨져 있었으며 다음 날 경찰이 근처에서 피해 여학생의 도려내진 유방 일부와 책가방을 찾아냈다.] 충격이 상당했음에도 학교에서는 야자를 중지하지 않았다고 한다. 참고로 야간자율학습이 밤늦게 끝나기에 학생들이 범행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. 경기도, 부산광역시[* 여기는 김석준의 취임 이후 야간자율학습이 21시로 제한되었다.] 등 일부 도를 제외한 곳에선 [[야간자율학습]]이 말 그대로 야간타율학습 정도로 강행되는 경우가 많다. 당장 [[전두환 정부]]가 야간자율학습을 강행했으며 당시 야간자습을 도망가거나 거부하는 행위는 반정부 취급하여 [[삼청교육대]]로 입소시킨 것으로 악명 높았고 [[노태우 정부]] 역시 야간자율학습에 옹호하는 입장이었다. 그 외에도 당시 야간자율학습이 짼 기록이 있다면 대학교 면접에서 광탈하거나 들어왔더라도 교수들한테 낙인찍혀 F학점을 받는건 물론이고 직장생활에서도 상사한테 대놓고 욕 얻어먹는 건 기본이요 아예 짤라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. 21세기에도 야간자습 참여 기록으로 갈구는 상사들이 몇몇 있다. * 진범 수사 재개를 발표한 9월 19일보다 9일이 이른 9월 10일 [[디시인사이드]]의 한 갤러리에 "우리 서 근처에서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진범이 나와서 난리가 났다" 라는 글이 올라왔다. 현재는 삭제된 상태지만 해당 본문은 [[http://mlbpark.donga.com/mp/b.php?p=1&b=bullpen&id=201909180035647937&select=&query=&user=&site=&reply=&source=&sig=h6jRGg-Aih9RKfX@h-j9Rg-gKmlq|박제]]되어 여러 [[https://m.ruliweb.com/community/board/300148/read/33338876|사이트]]에서 재조명되었다. 하지만 주작일 가능성이 높다. [[http://mlbpark.donga.com/mp/b.php?m=search&p=271&b=bullpen&id=201909180035649725&select=sct&query=%EC%A3%BC%EC%9E%91&user=&site=donga.com&reply=&source=&sig=hgj9Hl-1ghjRKfX@h-jXHl-Y5mlq|#]] * 만화 김희민의 필명 [[기안84]]의 의미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 기안동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. 기안84의 블로그 설명에 "기안84 뜻은 논두렁이 아름답고 여자들이 실종되는 도시. 화성시 기안동에 살던 84년생" 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. [[기안84/논란]] 참고. *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서 [[동탄신도시|동탄 지역에 조성된 신도시]]의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. 초기에는 '''화성신도시'''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나 [[한국토지주택공사]]가 이 사건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는 이유로 '''동탄신도시'''라는 명칭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결국 지역 명칭에도 영향을 주었다. [[https://n.news.naver.com/mnews/article/015/0000584412?sid=101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